영원한 숙제 중 하나인 양성평등. 이는 담배규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흡연자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던 만큼 여성은 다양한 담배규제 정책의 개발 및 시행 과정에서 직ㆍ간접적으로 배제되어 왔으며, 사회ㆍ문화적 약자의 위치에서 간접흡연의 위험에는 더 크게 노출되어 왔다. 그리고 이제 남성만큼 여성의 흡연이 만연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모두를 담배의 폐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담배규제 정책의 개발이 시급한 이유이다.
성 인지적 관점이란?
성 인지적(Gender-sensitive 또는 Gender-specific) 관점이란 여성과 남성이 각각 다른 이해나 요구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 및 현상이 여성과 남성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파악하여 특정 성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도록 검토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양성평등한 대안을 도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을 정책 개발 또는 평가에 적용하여 국가의 정책과 사업을 개발하거나 시행할 때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요구와 삶의 경험, 특성과 차이를 반영하여 그 결과가 양성 간 형평성과 평등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 인지적 정책이다. 성 인지적 정책의 개발과 시행은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이해와 욕구를 수용하여 성ㆍ연령ㆍ직업ㆍ계층ㆍ학력ㆍ지역 등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삶의 질과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는 국제적인 정책 개발의 추세이기도 하다.
세계 담배규제 정책의 기본 틀인 WHO 담배규제기본협약(WHO Framework Convention on Tobacco Control, 이하 WHO FCTC) 역시 성 인지적 관점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협약 이행 전반에 이를 적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협약 전문에서는 세계적으로 여성과 소녀의 흡연 및 기타 유형의 담배 소비 증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모든 정책 결정과 집행 단계에서 여성의 전면적 참여와 성 인지적 담배규제 전략의 필요성을 유념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협약 제4조 기본 원칙(General Principles)에서는 담배규제 전략 및 정책 개발 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로 성 인지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당사국은, 이 협약 및 의정서의 목표를 달성하고 그 규정들을 이행하기 위하여 특히 아래의 원칙을 지침으로 따른다
2. 국가적ㆍ지역적ㆍ국제적 차원에서의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조치와 조율된 대응방안을 개발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다음 각호를 고려한 확고한 정치적 결의가 필수적이다.
(가) 모든 사람을 담배연기에의 노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필요성
(나) 모든 유형의 담배제품에 대하여 흡연의 시작을 방지하고, 금연을 촉진ㆍ지원하며, 소비를 감소시키기 위한 조치의 필요성
(다) 토착민 개인 및 공동체의 요구와 관점에 비추어 사회적ㆍ문화적으로 적절한 담배규제 프로그램을 개발ㆍ시행ㆍ평가하고 이 과정에 토착민 개인 및 공동체의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한 조치의 필요성
성 인지적 담배규제가 필요한 이유
181개 당사국이 이행하고 있는 WHO FCTC가 담배규제 개발 및 시행의 필수 요소 중 하나로 성 인지적 조치를 강조하는 데에는 단순히 성 인지적 관점의 적용이 정책 개발의 대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담배규제에 성 인지적 관점을 적용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지금까지의 담배규제 정책으로는 여성이 담배 사용으로 인한 위험으로부터 충분하게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담배로 인한 폐해에 더 취약하다는 것이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 매일흡연자의 수가 남성의 경우 10억 명, 여성의 경우 2억 5천만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흡연자 수로만 보면 담배 사용이 초래하는 위험에 남성이 더 크게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여성에 비해 남성의 흡연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여성에 비해 남성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남성 흡연자 수는 정점에 이르러 감소 추세에 접어들고 있는 반면 여성의 흡연율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담배 사용 인구, 즉 흡연율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은 곧 이로 인한 질병 및사 망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흡연율과 그에 따른 사망률의 추이를 크게 4단계로 설명하는 이른바 ‘흡연의 4단계’ 모델은 남성과 여성의 담배 소비 행태 차이에 따른 흡연율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 모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늦게 흡연을 시작하고 상대적으로 흡연량이 적은 만큼 담배로 인한 질병이나 사망의 폐해가 뒤늦게 나타난다. 남성흡연율이 감소 추세에 접어드는 반면 여성흡연율이 증가 또는 정체하는 단계가 흡연의 4단계 중 세 번째 단계인데, 대부분의 국가들이 바로 이 단계에 진입했거나 진입을 앞두고 있다. 흡연으로 인한 여성 인구의 사망률 급증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여성흡연율이 현재 12%에서 2025년에는 20%까지 증가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에 WHO가 우려를 표명하고 담배규제 개발 시 성 인지적 위험 요소를 고려하도록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 역시 흡연의 4단계 모델에서 세 번째 단계에 진입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를 통한 지난 10년간의 우리나라 19세 이상 인구의 흡연율을 살펴보면 남성의 현재흡연율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여성의 현재흡연율은 변화가 거의 없는 정체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흡연율이 자가보고 형태로 조사되고 있어 자신의 흡연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는 여성의 경우 공식 통계보다 실제 흡연율이 최대 3배까지 높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정체가 아닌 증가 추세일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는 실정이다.
성 인지적 담배규제를 위한 과제
여성흡연율의 정체 또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성 인지적 담배규제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과 남성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성별에 따라 흡연을 하는 이유, 금연 동기, 흡연으로 인한 건강 폐해가 다르기 때문에 여성의 흡연율 감소 및 흡연 시작 예방을 위한 정책 개발을 위해서는 보건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사회ㆍ문화적 요인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흡연으로 인한 건강위험에 노출되는 수준이 다르다. 물론 흡연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롭지만,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남성보다 흡연으로 인한 건강위해에 더 취약하거나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건강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여성이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흡연으로 인한 건강 위험에 더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은 기도가 작기 때문에 담배연기 속의 독성물질이 보다 집약적으로 몸에 흡수될 우려가 높다. 게다가 여성의 경우 남성과는 다르게 담배연기를 대사하기 때문에 만성폐쇄성폐질환이나 폐암과 같은 호흡기 질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폐 구조의 차이는 남성보다 여성의 폐암이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직접흡연 또는 간접흡연은 유방암이나 자궁암과 같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질병의 발병 확률을 높이며 흡연을 하는 여성들은 비흡연 여성들에 비해 불임이나 난임을 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임신 중의 흡연은 조산, 사산 및 신생아 사망의 위험을 높여 태아와 산모 모두를 위협한다.
한편, 여성은 남성에 비해 니코틴 중독에도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에 비해 여성 흡연자의 혈류 내 니코틴 농도의 변화가 잦고 중독 증상이 빠르게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 남성보다 여성이 흡연 욕구가 더 크게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니코틴은 흥분제로서 집중도, 기억, 학습능력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과 긴장, 고통을 감소시키는 이중효과를 가져온다. 금연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긴장, 금연으로 인한 체중 증가에 대한 불안 등의 심리사회적 요인 및 출산 후 또는 폐경 후 호르몬 변화와 같은 생리적 요인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금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서 금단증상이 더 심하게 일어날 수 있는데, 이러한 금단증상을 줄일 수 있는 니코틴보조제가 남성 흡연자에 비해 여성 흡연자에게서 효과가 적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즉, 여성은 남성에 비해 흡연으로 인한 건강 위험이 더 높은 반면 금연에는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간접흡연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 다시 말해 직접흡연에 의한 건강위험뿐만 아니라 간접흡연에 의한 건강위험에도 남성에 비해 더 취약한 상황인 것이다. 이는 대체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사회ㆍ문화적 지위 차이에 따른 것으로 설명해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남성 흡연자들이 가정 내에서 흡연을 할 경우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여성 또는 여자아이들이 더 높은 비율로 간접흡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국민건강영양조사와 청소년건강행태온라인조사를 살펴보면 가정 내 간접흡연노출률이 성인과 청소년 모두에게서 남성(남학생)보다 여성(여학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여성의 담배 사용에 대한 보건 및 사회ㆍ문화적 측면의 연구가 매우 한정적인 만큼 정책을 본격적으로 개발 및 추진하기 위한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담배규제 정책이 대부분의 흡연자인 성인 남성의 금연을 촉진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개발 및 시행되어 온 만큼 여성의 담배 사용을 예방 및 규제하는 데에 필요한 성 인지적 관점 적용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았기 때문이다. 즉, 성별 간 담배 사용 요인, 행태 및 그로 인한 결과 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책을 개발 및 시행해야 한다는 점이 비교적 최근에서야 본격적으로 담배규제 분야의 이슈로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WHO FCTC의 본문에 여성 흡연에 대한 우려와 담배규제 개발 시 성 인지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협약 당사국이 모여 협약 이행의 전략과 방향을 논의하는 당사국 총회에서 성 인지적 담배규제에 대한 의제가 정식으로 상정된 것은 2016년에 개최된 제7차 당사국 총회에서였다. 반면, 담배업계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제품 판촉에 그대로 활용해 왔다. 담배업계는 흡연을 여성의 자유 또는 성평등의 가치와 동일시하고, 동시에 매력적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상징으로 내세우고자 하며 제품 광고를 통해 이러한 이미지를 퍼트린다. 1929년 미국 뉴욕 중심부에서 담배를 문 여성들이 행진하는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이란 이름의 퍼레이드가 여권 신장 운동의 탈을 쓴 담배회사의 마케팅 전략이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며, 지금까지도 이러한 마케팅 전략은 유지되고 있다. 광고뿐만 아니라 제품 개발 단계에서도 여성흡연자를 양산하기 위한 담배업계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데, 향이나 맛을 첨가하는 담배를 선보이거나 여성에게 어필할 만한 디자인의 담뱃갑을 내세우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궐련형 전자담배 역시 여성에게 어필할 만한 색상의 기기장치를 한정판으로 내놓는 등의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다.
WHO FCTC 제7차 당사국 총회는 지금까지의 담배규제 전략 개발 과정에서 성 인지적 관점이 미흡하게 고려되었다는 점과 여성 및 여자 아이들이 이 때문에 담배로 인한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우려하며 향후 담배규제 개발 시 고려되어야 하는 성 인지적 요인들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성 인지적 담배규제 정책 사례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협약 발효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성 인지적 담배규제 개발을 위한 국제적 차원의 노력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게 된 셈이다.
모두가 담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성 인지적 담배규제는 여성을 위한 담배규제의 필요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여성만을 위한’ 담배규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규제 개발 시 고려되어야 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성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궁극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를 담배의 폐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담배규제 정책의 개발과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자료와 근거가 부족한 여성 인구에 대한 연구가 개선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책의 1차 수혜자가 될 여성 인구를 대상으로 여성의 담배 사용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인식 개선의 노력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또 다른 반을 위한 담배규제, 온 인류를 위한 담배규제를 위한 또 다른 시작이다.
04554 서울시 중구 퇴계로 173 남산스퀘어빌딩 24층 | 문의 TEL 02-3781-3500 | FAX 02-3781-2299
Copyright 한국건강증진개발원 All right reserved.
04554 서울시 중구 퇴계로 173 남산스퀘어빌딩 24층
| TEL 02-3781-3500 | FAX 02-3781-2299
Copyright 한국건강증진개발원 All right reserved.
04554 서울시 중구 퇴계로 173
남산스퀘어빌딩 24층
| TEL 02-3781-3500 | FAX 02-3781-2299
Copyright 한국건강증진개발원 All right reserved.